2015년 1월 29일 목요일

이지아 힐링캠프, 서태지 정우성 김순흥 그리고 BBK

이지아 힐링캠프, 서태지 정우성 김순흥 그리고 BBK

이지아는 지난해 8월 세번결혼하는 여자 막바지에 힐링캠프에 출연하였다. 그간 서태지 이혼 소송 이후 칩거 상태였던 이지아는 세번결혼하는 여자로 컴백하였고 이지아를 이지아로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사실 서태지와 이지아 사이의 문제점을 끄집어 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지아를 감싸고 돌았던 4가지 키워드 바로 서태지, 정우성, 김순홍 그리고 BBK를 언급하고 싶을 뿐이다. (시간의 역순으로 구성)

|떠나보낸 남자 정우성 그리고 BBK













2011년초 정우성 이지아 열애 역시 굉장히 핫한 사건이었다. 서로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고 말을 아꼈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이지아(본명 김상은)와 서태지(본명 정현철)간의 이혼 소송이 진행된다는 루머(가 아닌 팩트)가 터지면서 세간을 놀라게 했다.

BBK 팩트 정리
 - 도곡동 땅을 판 돈을 다스에 투자 → BBK에 190억을 투자(190억 중 50억은 돌려받고, 140억은 돌려받기 위해 소송 중) 
  - 다스의 실소유자인 김재정(48% 지분 보유)이 사망 한 후, 김재정의 재산이 자식과 부인에게 골고루 상속된게 아니라  전부 부인에게로 상속 됨. 그 후 부인이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다스 회사지분의 5%를 떼어내어 청계재단에 기부함.

문제는 BBK와 이지아 법정 대리인이 법무법인 바른 이라는데 있다. 김경준 누나인 애리카김이 경찰에 자진출두하여 '주가 조작 횡령 사건은 김경준 혼자 저지른 것이고 BBK 실소유자가 대통령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미안하다' 라고 하면서 BBK 수사의 종지부를 찍고 자신의 명예훼손 죄는 털어내었다. (물론 나꼼수가 없었다면 지금은 잊고있는 김경준도 미국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이를 덮기 위해 바른측에서 일부러 뿌린게 아니냐는 루머도 있다.


|떠나간 남자 서태지



이지아가 19세로 추정되는 무렵 서태지 결혼 기사가 떴다. 물론 오보라고 묻혔다.

그러나 그 일이 진짜로 일어났다.

그 여대생은 이지아였던것이다. 당시 서태지 나이는 25세... 

아무리 X세대라지만 만나자마자 결혼하는 법은 없었다는것을 감안하면 16세부터 쫓아다녔다는 이지아의 말도 얼추 맞는말이된다. 어쨌든 칩거 생활에 익숙한 서태지와 일반인 이지아의 세상 사는 법의 차이는 무척 컸을 것이다. (아이가 있는지 여부는 패스) 거기에 연애도 아니고 결혼생활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결국 파경에 이르렀고 이혼 소송 중 이지아는 그간 이지아(또는 본명 김상은)의 삶을 살지 못한것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 심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데뷔할때 잘 써먹은 조상덕 김순흥 알고보니 친일파

데뷔 당시 이지아는 할아버지인 김순흥이 육영사업에 힘써왔다고 자랑을 하곤했다. 물론 소속사 보도자료 상으로 그러했지 이지아가 본인입으로 그러고 다니지는 않았다.




실제 이지아는 득될것 없다고 인터뷰한 바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지아 할아버지 김순홍의 일대기는 아래와 같다. (위키백과 참조)
일제 강점기 활동 
그는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국방 관련 단체에 헌금을 기부했다. 그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내역은 다음과 같다.[2]

1933년 8월 조선나예방협회 기금으로 1000원을 냈다.
1934년 6월 29일 조선중앙일보 감사역을 맡았다. (사장 여운형)[3]
1936년 2월부터 합자회사 구정상회 사장으로 있었다. 이때 교하간이교(校河簡易校)를 지을 땅을 1,500평을 기부하였다.[4]
1936년 7월부터 금융신탁회사인 우익상사 취체역[5]으로 있었다.
1937년 7월 22일 국방헌금 1만원을 종로경찰서에 헌납했다. 그는 "나라에 대한 봉사의 뜻을 표하고자 적은 돈이나마 바치오니 받아주십시오"하고 돌아갔다.[6] (내자정 162-2 김순흥, 내자정은 이후 내자동)
1937년 조선군사후원연맹 사업비로 2500원을 냈으며, 같은해 9월 5일 결성된 '경기도내 군기헌납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비행기 대금 500원을 냈다.(당시 군용기 1대 75,000원)[7] 반일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일선융화'를 내걸고 결성된 동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를 위해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하여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에서 참사를 맡았다.
1939년 9월 주식회사 쇼와직물을 설립하여 사장을 역임.
1940년 9월 중앙연료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다.
1943년 8월 징병제 실시에 감격하여 국방헌금 3000원을 헌납했다. ?
1944년 4월 일본 정부가 주는 감수포장을 받았다.
해방 이후 
해방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5년 12월 대한경제보국회 감사를 맡았다. 1948년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이 지목한 숙청대상 친일인사들 명단초안에도 이름이 올랐다. [8]

사망 
1981년 10월 26일 사망했다. 동아일보 1981년 10월 28일자에는 “학교법인 이화학원(이화여자대학교) 이사 김순흥씨가 새벽 4시 50분 서울 종로구 내자동 167-2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장례는 서울예고에서 이화학원장으로 거행된다고 밝혔다.”[9] 이 주소는 1937년 7월 22일 일제 강점기 종로경찰서에 국방헌금 1만원을 헌납했던 주소와 성명이 일치한다. 1948년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 2009년 친일인명사전 경제부문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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